무엇을 건네준 사람일까?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08-02-13 17:23
조회수 2,772
어머니는 나를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기도를 데리고 나갔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눈이 많이 왔는지
잠이 아직 덜 깬 나는 장화속으로 넘쳐 들어오는 차가운 눈 때문에 단잠을 깼다.
"우리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 많은데
왜 어린 나를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냐"고 어머니께 투정을 했더니
어머니는 "너는 일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니
어려서 부터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이 가고 나는 죽어도 새벽기도 해야 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런데 내가 입학한 인일여고는 아침 6시 40분에 첫 수업을시작하는 학교였다.
새벽기도에 갔다가 학교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션 스쿨도 아니니 어쩌나 생각하다가
나는 학교 게시판에 "내일 부터 무용실 앞에서 새벽기도 있음."이라고 써 붙혔다.
"한 명도 안 나오면 나혼자 하지 뭐."
그렇게 마음먹고 나간 첫 날 3명이 모이고 대여섯 명으로 늘더니
어느 날은 열 명이 모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네가 매어져 있는 무용실 앞 산자락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도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수업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첫날 우리들은 어떤 산사나이의 안내를 받아
흔들바위 울산바위를 다녀왔으니 얼마나 피곤한지 말하기도 싫었다.
수학여행까지 왔으니 새벽기도는 쉴까?
그냥 깊은 잠에 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친구들과 밤늦도록 놀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여관 대문에 이렇게 써 붙혔다.
'내일 새벽기도는 여관앞 개울에서 새벽 5시에 있음'
이렇게 수학여행 기간내내 새벽 기도를 쉬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무학교회의 사모인 경숙이가
"정옥아! 너 고등학교때 예수 열성당 이었던 것 생각나니
나는 그 때 이미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이든 큰 일 낼 줄 알았어.
네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서도 새벽기도 인도했잖아
그 때 나도 새벽에 나갔는데 그 날 굽이쳐 흐르는 개울물소리가
우리들의 찬양소리에 묻혀버린게 아니겠니
열여덟명이나 개울가 새벽기도에 나왔었어.
그 친구들이 지금은 큰 교회 목회자 사모들이 되었잖아.
나는 경숙이의 말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주님은 30년이 지나서도 그 날 드린 기도에 넘치도록 열매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셨다.
며칠 후 한 장로님이 전화를 했다.
"사모님! 이번에 전국 장로 연합회를 설악산에서 하게 되었는데
모처럼 설악산에 모였으니 새벽기도는 생략하는게 어떠냐고 결정을 했는데
나는 인터넷에서 인일여고 학생들이 설악산 수학여행지에서도 새벽기도를
했다는 글을 보았으니 양심이 찔려서 동의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이 내용을 말했더니 장로님들이 고등학교 여학생들도 수학여행 와서도 새벽기도를 했는데
장로들이 이모양이었으니 어떡하냐고 전원 회개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어요.
당연히 그 날 새벽 기도는 은혜충만 성령 충만이었음은 말 할 것도 없지요."
며칠 후 전화가 걸려왔다.
"정옥아! 나 윤석란이야. 너 나 기억하니?
인일여고 다닐때 내가 너를 피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줄 아니?
수업시간만 끝나면 나를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따라 다녔잖아.
점심시간에 겨우 따돌렸다 싶으면
하교 시간에 또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예수 믿으라고 애원했지
그런 너의 끈질긴 전도에 예수 믿게 됐고
목사에게 시집가서 지금은 러시아 선교사로 일하고 있어.
그 때는 네가 귀찮고 싫었는데
지금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너의 이름을 전한단다
나에게 예수를 전해줘서 내 인생을 가치있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정옥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전도해 줘서 정말 고마워!
30년 후에 이 전화를 받으며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서서 한없이 울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폐암으로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담배를 처음 건네준 사람이 바로 목사 아들이었다고 원망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사람의 인생에 나는 무엇을 건네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그 때는 왜 그렇게 눈이 많이 왔는지
잠이 아직 덜 깬 나는 장화속으로 넘쳐 들어오는 차가운 눈 때문에 단잠을 깼다.
"우리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 많은데
왜 어린 나를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냐"고 어머니께 투정을 했더니
어머니는 "너는 일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니
어려서 부터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이 가고 나는 죽어도 새벽기도 해야 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런데 내가 입학한 인일여고는 아침 6시 40분에 첫 수업을시작하는 학교였다.
새벽기도에 갔다가 학교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션 스쿨도 아니니 어쩌나 생각하다가
나는 학교 게시판에 "내일 부터 무용실 앞에서 새벽기도 있음."이라고 써 붙혔다.
"한 명도 안 나오면 나혼자 하지 뭐."
그렇게 마음먹고 나간 첫 날 3명이 모이고 대여섯 명으로 늘더니
어느 날은 열 명이 모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네가 매어져 있는 무용실 앞 산자락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도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수업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첫날 우리들은 어떤 산사나이의 안내를 받아
흔들바위 울산바위를 다녀왔으니 얼마나 피곤한지 말하기도 싫었다.
수학여행까지 왔으니 새벽기도는 쉴까?
그냥 깊은 잠에 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친구들과 밤늦도록 놀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여관 대문에 이렇게 써 붙혔다.
'내일 새벽기도는 여관앞 개울에서 새벽 5시에 있음'
이렇게 수학여행 기간내내 새벽 기도를 쉬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무학교회의 사모인 경숙이가
"정옥아! 너 고등학교때 예수 열성당 이었던 것 생각나니
나는 그 때 이미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이든 큰 일 낼 줄 알았어.
네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서도 새벽기도 인도했잖아
그 때 나도 새벽에 나갔는데 그 날 굽이쳐 흐르는 개울물소리가
우리들의 찬양소리에 묻혀버린게 아니겠니
열여덟명이나 개울가 새벽기도에 나왔었어.
그 친구들이 지금은 큰 교회 목회자 사모들이 되었잖아.
나는 경숙이의 말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주님은 30년이 지나서도 그 날 드린 기도에 넘치도록 열매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셨다.
며칠 후 한 장로님이 전화를 했다.
"사모님! 이번에 전국 장로 연합회를 설악산에서 하게 되었는데
모처럼 설악산에 모였으니 새벽기도는 생략하는게 어떠냐고 결정을 했는데
나는 인터넷에서 인일여고 학생들이 설악산 수학여행지에서도 새벽기도를
했다는 글을 보았으니 양심이 찔려서 동의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이 내용을 말했더니 장로님들이 고등학교 여학생들도 수학여행 와서도 새벽기도를 했는데
장로들이 이모양이었으니 어떡하냐고 전원 회개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어요.
당연히 그 날 새벽 기도는 은혜충만 성령 충만이었음은 말 할 것도 없지요."
며칠 후 전화가 걸려왔다.
"정옥아! 나 윤석란이야. 너 나 기억하니?
인일여고 다닐때 내가 너를 피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줄 아니?
수업시간만 끝나면 나를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따라 다녔잖아.
점심시간에 겨우 따돌렸다 싶으면
하교 시간에 또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예수 믿으라고 애원했지
그런 너의 끈질긴 전도에 예수 믿게 됐고
목사에게 시집가서 지금은 러시아 선교사로 일하고 있어.
그 때는 네가 귀찮고 싫었는데
지금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너의 이름을 전한단다
나에게 예수를 전해줘서 내 인생을 가치있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정옥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전도해 줘서 정말 고마워!
30년 후에 이 전화를 받으며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서서 한없이 울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폐암으로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담배를 처음 건네준 사람이 바로 목사 아들이었다고 원망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사람의 인생에 나는 무엇을 건네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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